
쨍그랑 소리에 모든 시선이 집중된다. 벽에 비치된 의료용 상자를 뜯어 열며, 손에 난 상처는 짓누르지만, 넘치는 감정은 조절하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난 그를 진정시킨다. 시선은 단 한 곳, 마주한 한 시선만을 꿰뚫는다. 행성은 궤도를 따라 돌고, 인공위성은 그런 자연을 모방한다. 우리는 운명을 따라 걷고, 숙명은 그런 우리를 모방하며—
“나탈리야.”
“응, 소냐”
—그건 우리가 이루어낸 하나의 이야기, 어디에도 기록되지 못한 채 우리의 기억에 영원히 살아있을 궤도와 숙명(宿命). 매일 밤 잠드는 우리와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나는 목숨. 타인을 위해 생을 이어가는 지마. 타인을 위해 사를 꿈꾸는 로사. 소냐와 나탈리야.
“...로사.”
“응, 지마.”
언제나 변화는 힘들고, 우리는 힘든 일을 자처해서 하고 싶지 않으니,
“그만 좀 울면 안 돼? 진짜 꼴불견이야.”
“정말, 성격 지랄 맞은 것 좀 봐.”
언제나 미래는 아프고, 우리는 이미 충분히 다쳤으니,
“너만 하겠니?”
“진짜 한마디를 안 진다니까.”
언제나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입히고 이해하며 함께 했으니,
“나답잖아.”
“응, 너답네.”
우리에게 끝이 있다면, 그건 서로가 아닐까. 동백의 목을 잘라내어 손에 묻은 붉은 염료에는 우리의 과거가 물들어 있고, 당신의 목에 잡아 손끝에서 느껴지는 맥박에는 우리의 미래가 울려 있다. 너에게 도취하고 욕망하였지만, 서로의 목숨만을 손에 넣었으니.
다시 한번 올라가 보는 거야, 커튼 뒤로, 무대 위로, 계단을 올라 조명이 비추는 곳으로. 칠이 벗겨진 테이프로 표시해 둔 가운데, 그 지점에 우리는 목숨을 내놓고 서로의 심장을 꿰뚫을 때,
“너다워.”
적당히 불행할 만큼
Operator Зима & Роса Record
Record By. 시
null
“정말 화해 안 할 거야?”
“화해? 장난해?”
저녁 8시, 로도스의 바쁜 일과가 대부분 마무리 지어지는 시간. 각자가 오퍼레이터의 자리를 내려놓고, 자신의 위치로 되돌아가는 시간. 분명 평화로워야 할 시간에, 모든 것에 예외는 있듯, 지마는 머리를 싸매고 방바닥에 누워있었다. 누가 뒤에서 밀쳐 넘어지기라도 한 듯 바닥에 얼굴을 박고, 그 모습을 이스티나와 굼이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누가 보면 마치 그 둘이 지마를 협박하고 있는 꼴일 것이다.
“지금 당장 화해 안 하고 오면, 다음엔 강제로 둘이 만나게 할 거니깐요.”
“하…. 돌았어….”
협박은 그 반대였지만.
화해라고 말하기에도 웃긴 상황이었다. 쌍방으로 싸웠다면 모를까, 지마의 일방적 시비였으니. 시작은 카페테리아에서의 평화로운 아침 식사였으나, (언제나 그랬듯) 둘의 시간은 주먹다짐으로 바뀌었다. 주변의 오퍼레이터들이 지마를 붙잡고 있는 와중에도 데자뷔 같다며 얼빠지게 웃고 있는 로사의 얼굴에 두 번째 주먹을 꽂은 게 문제였을까.
로사. 나탈리야.
I
우리는 삶을 발견했고, 생명을 일그러뜨렸으며, 그 끝을 찬미했으며, 그래서, 그래서 우리는, 결국 무엇을 마주했던 것일까. 아마 그 누구도 평생 답해주질 못할 질문만을 입안에서 곱씹으며, 잔인하기도 하지—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나머지를 맞이한다.
우리는 계속 걸을 것이고, 원치 않더라도 우리의 등을 떠미는 그들의 기대에, 그들의 만족을 위해 걸어야만 할 것이고, 그 걸음에 우린 언제나 함께하겠지—속죄와 후회, 한탄과 설움, 삶과 죽음, 기회와 찰나, 기도와 찬가, 찬가와 찬란. 로도스 아일랜드와 우르수스 학생 자치단에, 그리고 로사. 오퍼레이터 로사와 나탈리야. 나탈리야, 나탈리야, 나탈리야.
II
“소냐.”
“….”
“소냐?”
“….”
“소—”
“이름 닳겠다!”
얼굴 옆을 스치며 날아온 책을 간단히 잡고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눈을 마주치면 온 표정으로 분노를 표출해내는 지마가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고 있다.
“어차피 잡을 거 알았으면서.”
“좀 맞아주지 그랬냐?”
“정통으로 맞으면, 나, 머리 나갔을 텐데.”
“알아.”
반강제적으로 얻어낸 책을 몇 장 넘겨보면 지마의 요즘 관심사를 알아볼 수 있다. 요즘 트렌드 패션이구나. 금방 흥미를 잃어 덮어버렸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마는 여유롭게 책이나 넘겨보고 있는 상대의 행동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입을 연다.
“또 그 쓸데없는 무도회 얘기?”
“쓸데없는 게 아니라, 소냐,”
“쓸데없지. 있는 거 없는 거 다 꾸미고선, 좁아터지겠는데 시시덕거리고 있는 게 뭐가 좋다고.”
“한 번만 더 생각해보면 안 될까? 로도스에서 다 같이 하는 거잖아,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 줄 알고. 기왕 가기로 한 거, 일부로 시간 들여서 가자는 거지. 다들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소냐도 소냐 나름의 뭔가 준비를—”
“그러니깐, 그런 기회 줘도 싫다니깐 그러네. 그런 건, 당신 같은 사람이나 예쁘게 꾸며 입고 다녀오세요.”
“….”
회상하고 싶지 않은, 더는 회상할 수 없는 그 영겁 같던 시간은 끝난 지 오래. 로도스 아일랜드로 온 아이들은 각자 나름의 성장과 치유, 훈련과 자책을 하고 있었다. 성장이 그들을 더 먼 미래로 한 걸음 나아가게 했다면, 반복된 치유는 그때의 상처를 더 깊게 파고 들어가며 나름의 회복을 반복했고, 훈련은 그들에게 각자의 목표와 다짐을 심어줬으며, 자책은 여전히 그들의 삶 한쪽에 자리 잡은 채 자라나고 있었다. 그들은 더는 ‘아이들’이 될 수 없었으며, 주변의 모든 것들이 그들의 등을 떠밀고 있다. 한 걸음 더. 멈춰있으면 안 된다고. 세상은 영원한 ‘아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와중에 로도스 아일랜드는 그들에게 시간의 여유를 준 처음이자, 마지막의 자유였다.
하루도 조용할 날 없는 로도스 아일랜드는, 매 순간 새로운 일이 터지기 마련이었다. 가령, 저쪽 복도 끝에서 오늘도 들리는 폭발음이라던가, 가까이선 박사의 후드를 붙잡아버리곤 결투를 신청하는 지마라던가. 이런 나날들에 갑작스레 날아온 무도회 초대장은 모두에게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줬다. 우르수스 학생 자치단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몇 주나 남은 본 행사에 입고갈 옷을 골라놓고선 하루 간격으로 마음을 바꾸더니, 이젠 직접 디자인에까지 손을 대기 시작한 안나라던가, 무도회에 참가하는 모두에게 선보이고 싶다며 완벽히 새로운 디저트 아이디어를 구상하기 시작하며, 온종일 부엌 한 켠에서 나올 생각 않는 라다까지. 언제나처럼 여유로운 표정 지으며 곧 다가올 무도회에 관한 생각을 묻는 말에도 느긋한 답변만을 주던 나탈리야마저도 속에선 신나다 못해 심장이 터질 듯 설레는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럼 소냐는?
보이는 대로였다. 세 명의 날을 가리지 않는 설득과 약간의 강요에도 그는 마음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며칠이 묵묵부답이었다. 안나와 라다와 동행하는 거야! 라며 얼굴을 붉히며 초대에 승낙하기 전까진 말이다. 이렇게 모든 일이 해결된 줄 알았건만, 소냐는 정말 ‘승낙’만 한 것이었지, 아무런 계획도, 준비도, 변화도 통하지 않고 있던 거였다.
꼭 특별한 옷을 차려입어야 하는 거야? 굳이 같이 갈 사람을 정해야 해? 어차피 우리끼리 갈 텐데?
반박할 수 없는 다 맞는 말들이었다. 로도스 내로 오가는 비공식 복장 규정들만이 존재할 뿐, 사실상 모든 의상이 허용되었고, 파트너 동행마저 필수가 아니었으며, 본인이 속한 그룹끼리라던가 가족 단위로 참가하겠다는 참가자들의 수가 대부분이었다. 우르수스 학생 자치단의 궁극적 목표는 소냐를 포함한 모든 학생 자치단 회원들의 무도회 참가였고, 그들의 목표는 이미 달성된 지 오래였는데, 로사의 목적만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이었다.
일찍이 잃어버린 ‘평범한’ 학창 생활을 조금이나마 되찾기 위한 노력이라던가, 일상을 집어삼킨 변화들에 대처하는 웃음 속 진심의 감정을 찾는 노력이라던가, 평생을 옳은 신념이라 믿으며 살아왔음에도, 생명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던가. 매 순간 새로운 변화를 마주하고 성장을 추구하는 가운데에 로사는 지마에게도 그런 만남을 선물하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역시, 로사뿐 아니라 학생 자치단의 모두가 그랬다. 본인보다 학생 자치단의 다른 이를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큰 진영인 만큼 이번 무도회에서 개개인이 아닌 ‘우르수스 학생 자치단’ 으로서 즐기고 싶다는 생각을 먼저 하고 있던 것이었다. 이번 무도회는 이들에게 한 번의 성장, 순간의 변화와 찰나의 휴가가 될 테니까—굼의 강인함과 활기참, 이스티나의 준비성과 끈질김, 그리고 로사가 추구하는 이상적임에 붙잡힌 지마에겐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III
아쉽게도 우르수스 학생 자치단의 모두에게 재봉이나 수선에 특출난 재능은 있지 않았으니, 거창하게 계획한 모든 준비 과정을 거칠 수는 없었으나, 로도스의 자원과 지원은 그들에게는 충분하고도 넘쳐났다.
나탈리야에게 특정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의복을 입는 일이 어색하지는 않았으니, 몸에 밴 ‘이상적인’ 습관처럼 의복을 준비했다. 목과 허리선이 프릴로 장식된 블라우스의 아래에 퍼져있는 벨라인으로 마무리되는 흰색의 드레스. 몇 겹으로 이루어져 있는 드레스는 안쪽 층으로 가까워질수록 옅은 분홍빛을 띠었다. 빗장뼈 위와 손목 위로 끝까지 잠겨있는 단추. 소매와 허리춤, 드레스 하단 끝자락엔 작은 보석들과 레이스로 가볍게 장식되어있었으며, 주름이 잡힌 부분마다 놓인 자수 장식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분위기를 연출해내었다. 어깨에 목선이 베이지색 털로 장식되어있는 남색 케이프를 덮고 하나로 올려묶은 머리카락에 유리로 된 장식을 해, 빛이 내리는 곳마다 청량함이 비춘다. 어울리는 높이의 굽 부츠를 신으면 드레스 끝자락은 발목을 스치는 길이가 되어, 거울 앞에 서면 안정적이고 단정하면서도 아무도 따라 할 수 없는 그가 거울에 비친다. 몸 전체를 숨길 수 있을 것 같이 퍼져있는 드레스를 양손으로 몇 번 가지고 놀다가 한 바퀴 돌아보면, 라눙쿨루스의 꽃잎을 연상시키는 공중 속 드레스의 끝자락이 강인한 인상을 남긴다.
무도회 하루 전날, 로도스는 회사보다는 벌써 파티의 분위기가 물씬했다. 각자가 각자의 위치에서 내일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으며, 이 시간을 기회 삼아 평소엔 나누지 못했던 대화와 감정들을 나누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중에는 로사의 방에 모인 우르수스 학생 자치단 모두가 포함되어있었다. 비장하게 바닥에 원을 이루어 앉은 그들 사이에는 한 품에 들어야 할 크기의 큰 상자가 놓여있었고 모두가 그것만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하지만 그들만이 알고 있는 상자 안의 내용물—지마의 무도회 의상이었다.
민소매로 시작해 어깨선과 허리춤에 금색 자수가 놓인, 아랫단이 무릎을 살짝 넘는 검은색 밸 길이 (Bell-Length) 드레스는 적당히 풍성하게 펴지는 하단과 레이스가 끝을 마무리 지었으며, 전체적으로 불편하지 않은 소재로 이루어져, 지마의 활동량에도 불편함이 없도록 제작되었다. 그 위로는 정장 재킷을 본뜬, 가슴을 덮을 옷기장의 흰색 긴소매 상의가 장식한다. 구두는 깔끔한 디자인의 굽이 낮은 검은색 구두였으며, 생각보다 패션과 유행에 관심이 넘치는 지마에게 부족하지도, 또 부담스럽도록 넘치지도 않는 완벽한 의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시작은 서프라이즈 선물이었지만 지마는 진작에 눈치챈 지 오래였다. 본인들 딴엔 티가 안 난다고 생각했겠지만, 얼씨구, 그렇게 단체로 피해 다니는데 퍽 티가 안 나겠다.
IV
가족 간의 사랑과 친구 간의 우정이 존재하는 이 사회에 사랑과 우정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둘 사이에 새로운 변화라고 생각했다. 나탈리야는 무도회를 본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려던 게 아닐까. 이기적이라는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나탈리야는 그것을 전부 받아들일 것이다. 반박할 수 없는 본인을 향한 올바른 판단이었으니까.
세상에 두 명분의 심장 소리가 사라진다면 몇 명의 사람이 알아줄까. 그 사라진 빈자리를 얼마 있지 않아 새로운 숨소리가 메꿀 것이고, 언젠가 존재했던 두 숨소리는 잊힐 것이다. 삶에 의미가 무엇일까, 라는 질문에 편히 답변하지 못하는 그들이라 서로를 비난하고 탓하고 책임을 무는 게 아닐까.
V
“하…. 진짜 싫어, 너.”
“알고 있어. 그리고,”
“그리고?”
“이젠 더 기대하지도 않고.”
“소냐.”
“말해.”
“아직도 나는 네게 그냥 단순히, 우연히 같이 살아남은 존재일 뿐이야?”
“...시끄러워.”
“안나에게도, 라다에게도, 아직도 나는 그들의 마음 한쪽에 자리 잡지 못했으니까. 우리는 분명 친구가 아닐 텐데, 분명 그 둘의 나를 향한 행동들은 단순히 인간적인 행동일 뿐일 텐데.”
“...”
“‘소냐’는 죽었어. ‘지마’는 살아남았지. ‘이스타나‘도, ’굼‘도 살아남았어. 하지만 나는? 내가 그 둘에게 ’나탈리야‘ 가 아닌, ’로사’로 다가갈 수 있길 바라는 건, 너무 큰 소원일까?”
그리고 내 소원엔 너도 포함이야, 소냐.
애써 뒷말을 삼켰다. 입에서 목으로 쓰고도 텁텁한 감정이 넘어간다.
“또 시작이네.”
“으, 응?”
“너 설마 아직도…!”
지마의 표정에는 확실한 분노의 감정이 차 있었다.
그날, 차라리 네가 나를 죽여줬으면 좋았을 텐데.
로사의 한 마디는 지마에게 족쇄처럼 채워진 지 오래였다. 티 내지 않았지만, 친구조차 되지 못한 단순히 같이 생존한 사이라고 그 둘의 관계에 이름 지었지만, 나탈리야는 신경 쓰고 싶지 않다고 쓰지 않을 수 없는 존재였다.
저번에 때린 것도 아직 사과도 못 했는데.
사과할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마땅한 이유를, 시점을, 핑계를 찾지 못해 미루다 보니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날 만큼 흘러있을 뿐이었다. 지마는, 소냐는 나탈리야를 좋아할 수 없었다. 로스토바의 성씨를 가지고 태어나, 제4중학교의 진주로 성장한 로사를, 지마는 태생부터 다른 존재로 여겼으니까. 그 진주가 귀족들을 위해 저지른 일이 가장 큰 시발점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우스웠을까, 무슨 짓을 벌였는지도 모르고 살려줬으니, 살려주곤 함께 했으니.
언제나 얼굴에 달고 다니는 멍청하게 웃고 있는 표정 뒤로 얼마나 비웃음의 표정을 지어왔을까.
무언가를 내치듯, 아니 휘어잡듯 로사의 손을 거칠게 잡으면 따라잡을 수 없는 키 차이에도, 상대의 굳건함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치게 된다. 할 말은, 전하고 싶은 감정은 많은데 입을 열어도 단어 하나 나오지 않는 본인의 상황에 짜증이나 아랫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피한다. 당당하게 손까지 빼앗아 잡았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모습이 얼마나 우스울까 생각하면서도 잠깐의 침묵 후 입을 열었다.
“다르게 보이고 싶다면 좀 예쁘게 굴어보던가.”
미친. 자신의 발언을 인지하고 얼굴이 붉어질 때쯤 이번엔 로사 쪽에서 입을 열어 웃음을 흘렸다. 얼씨구. 멈추지 않는 웃음에 이젠 그냥 눈물까지 흘리면서 애써 입을 막는 로사의 모습에 당장이라도 얼굴에 주먹을 날리곤 도망가고 싶었지만, 오늘을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애써 꾸몄으니까—마지막 배려다 이게.
“우연히 같이 살아남은 사이라면, 같이 살아가 보자고.”
그 말을 들은 로사의 얼굴에는 씁쓸한 미소만이 남아있다. 무슨 감정의 표현일까, 동의? 후회? 회상?
“살아남았으니까, 살기 위해 계속 살아보자고.”
“죽기 위해 살아가는 거라면?”
“미친놈.”
VI
두 사람 분의 발소리가 복도 전체에 울려 퍼지면서 모두의 시선이 계단 접합부의 둘을 향한다. 세상에 두 명분의 심장 소리가 사라진다면 몇 명의 사람이 알아줄까. 그 사라진 빈자리를 얼마 있지 않아 새로운 숨소리가 메꿀 것이고, 언젠가 존재했던 두 숨소리는 잊힐 것이다.
이런 세상 속에서 서로를 탓하며 수취인 없는 울음을 터뜨리는 둘에게 금빛의 조명 빛이 쬔다.
VII
무도회의 금빛 조명이 바닥을 비추면 그 위를 두 사람의 가벼운 발걸음이 짓밟는다. 아직은 읽을 수 없는 서로의 생각, 아직은 느낄 수 없는 서로의 감정과— 아직은 망설임 없이는 잡을 수 없는 상대의 손. 그들의 앞에 놓인 속죄와 후회, 한탄과 설움, 삶과 죽음, 기회와 찰나, 기도와 찬가, 찬란. 무엇을 집을지는 아무도, 본인조차도 모르고 있지만, 그들의 시간 앞에 놓인 것들을 이제는 아무도 앗아가지 않을 테니 그들의 손으로 선택하면 될 것이다.
죽음은 그들 앞에 놓여있었고, 옆에서 불어오는 시간은 종말을 속삭였다. 두 사람은 함께 죽음을 삼켰지만—
죽기 위해, 살아보려고,
살기 위해, 살아보려고.
VIII
너와 함께 있어서, 적당히 불행할 만큼만.
